필기구의 복고화
팔로미노 블랙윙, 오렌지, 포레스트 초이스 연필
새로운 꽂힘
요즘 문방구에 꽂힌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는 아무 무늬도 없는 밋밋한 공책을 어떻게 예쁘게 꾸미고 싶다~ 라는 충동이 일어나 마스킹 테이프와 스탬프를 사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글씨를 쓰는 도구 자체로까지 번진 것 같습니다. 요 며칠, 미친 듯이, 정말로 뭔가에 홀린 듯이 열심히, 연필을 사 댔습니다.
벌써 10년쯤 되었을 겁니다.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우연히 무척 저렴한 만년필을 발견한 뒤로, 제 개인적인 필기도구는 만년필이 되었습니다. 워낙 저렴해서, 그냥 쓰다가 고장 나면 버리자, 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하게 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된 듯 합니다. 만년필도 조금씩 길이 들고, 만년필로 글씨를 쓸 때면 그 사각사각 쓰이는 느낌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랬는데.
제가 글씨를 그리 잘 쓰는 편이 못 됩니다.
덤으로 악력도 약함 + 그나마도 지금 글씨를 쓰는 손은 원래 손의 반대손입니다. 원래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오른손잡이였는데, 오른손목의 인대를 다친 뒤 손가락을 자주 쓰는 작업을 하면 손목이 뻐근해져서 말이지요. 젓가락질부터 마우스 다루는 것까지 모두 왼손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원래 오른손잡이로 20년 넘게 살다가, 갑자기 바꾸려니 손힘이 많이 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기구를 잡으면 필기구가 손에서 약간 헛도는 경향이 있습니다. 손힘이 약함 + 만년필은 필압이 강할 필요가 없음 = 글씨가 자꾸 미끄러지는 것 같아서 불편할 때가 없진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요즘에는 문득 공책에 아날로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만년필로는 쓰기가 싫고.
볼펜은, 또 너무 진한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고.
소거법으로 이거 지우고, 저거 지우다보니 결국에는 기본으로 회귀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필!
그러고 보면, 연필이 글씨 교정하기에 좋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손의 잔근육을 키우는데도 효과적이라고 하고요. 그래서 간만에 필기구도 바꿔보자, 하는 생각에 연필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꽂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집에 굴러다니던 연필을 써 보려고 했으나, 연필은 이름 있는 브랜드의 것 = 가격이 다소 나가는 것이 쓰기에도 편하고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처음에는 모닝글로리의 학생용 (어린아이용의 캐릭터 연필이 아닌) 연필을 발견하고, 그것을 구매했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인터넷에서 별 생각없이 연필 브랜드를 검색했다가 카버파스텔과 팔라미노 블랙윙에 대해 알게 되어, 또, 지르고 말았습니다. 팔라미노 블랙윙을 비롯해, 오렌지와 팔로미노의 저렴한 라인업인 포레스트 초이스. 그리고 덤으로 휴대용 연필깎이까지.
팔로미노 연필 세트
이번에 구입한 팔로미노 연필들은 블랙윙 세 자루, 오렌지 세 자루, 포레스트 초이스 한 다스(12잘).
그리고 연필은 아니지만, 블랙윙 연필통과 블랙윙 연필깎이입니다.
팔로미노 블랙윙
팔로미노 블랙윙입니다.
팔로미노 블랙윙의 색 자체는 우드색, 화이트, 그레이 블랙, 네 종류였는데, 아쉽게도 색은 심경마자 정해져 있는 것 같더군요. 저는 약간 진하면서도 부드러운 심 = B 정도를 사려고 했는데, B는 우드색 네이처이더군요. 그래서 색은 네이처로 통일.
그런데 블랙윙이 여타 연필 중에서도 꽤 많이 비싼 축에 들어가는 제품이었습니다.
한 자루에 인터넷에서 2000원 대 초반을 주고 샀는데, 단품으로만 놓고 보면 못 살 정도는 아닙니다.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두 자루는 살 수 있지요. 그렇지만 그것이 12개들이 다스로 개수가 늘어나면 조금 생각이란 걸 해 보게 됩니다. 순식간에 가격이 몇 만 원이 되니까요.
그런 구매자들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업체에서도 블랙윙이 너무 비쌈? 그럼, 좀 더 저렴한 가격에 괜춘한 성능의 연필을 만나 봐! 라면서 다른 라인업의 제품을 소개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더 저렴한 제품들을 살펴보다가 블랙윙의 구매여부를 다시 한 저 자신에게 물었는데, 그렇게 나온 숫자가 3입니다. 그래서 세 자루. 나머지 아홉 자루는 다음 달에 사자!
애석하게도 블랙윙은 아직 써보질 못했습니다.
얼른 깎아서 필기감을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세 자루밖에 안 되는 비싼 연필을 이렇게 쉽게 써 버리기에는 아까웠습니다. 우웅. 안 쓰면 똥이 된다고 하는데. 연필이 엄청 좋아서, 애들이 이것밖에 안 쓴다는 말도 후기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립감은 훌륭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판되는 여느 연필들보다 약간 가느다란 것 같은 느낌이 안 드는 것도 아닌데, 손에 들어와서 착 감기는 느낌이었습니다.
팔로미노 오렌지
팔로미노의 중간급 라인 오렌지.
블랙윙의 1/2 정도 가격입니다. 많이 싸지기는 했으나, 블랙윙을 모두 포기하고 좀 더 저렴한 라인업만을 사는 것은 왠지 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블랙윙을 섞어서 사면, 그만큼 가격이 올라가고.
그놈의 12개 한 다스의 주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친 결과가 블랙윙 세 자루, 오렌지 세 자루입니다.
후기에 따르면 지우개만 없다 뿐이지, 연필의 품질은 블랙윙이나 마찬가지라는 평이 있더군요. 가격이 더 저렴한 만큼 가성비가 더 좋다는 평도 있고요. 일단은 전체적인 평이 좋아서 조금은 안심입니다.
제가 산 팔로미노 연필 중 유일하게 지우개가 달리지 않아서 제일 가벼웠습니다.
과연 지우개 없는 블랙윙.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 자체는 블랙윙과 큰 차이가 없더군요. 손에 감기는 느낌.
그렇지만, 블랙윙과 비교하면, 전 손힘이 워낙 약해서 그런지, 지우개가 달려서 약간 묵직하게 눌러주는 편이 좀 더 잡고 있기가 편했습니다. 이쪽도 (지가) 3자루를 사 놓고, 몇 자루 안 된다고 아까워서 깎지를 못했습니다.
후기처럼 실제 필기감도 좋았으면 좋겠습니다.
팔로니모 포레스트 초이스
팔로미노 연필 중 제일 저렴한 라인입니다. 포레스트 초이스.
가격은 12개들이 한 다스가 모닝글로리 클래스메이스 연필 한 다스와 몇 백 원 차이 안 나더군요.
그럼에도 이름있는 브랜드가 OEM으로 뽑아내는 제품이라 그런지 평은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어떤 분은 블랙윙보다 이쪽이 차라리 더 좋았다고 하기도 하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가격은 저렴한데 품질은 좋다고 하는 분도 계시더군요.
그립감은 역시 비싼 몸들에 비해 약간 떨어지긴 합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그런 것뿐, 손에 쥐고 있으면 충분히 편합니다. 뭣보다 비싼 몸들과 마찬가지로 육각의 몸통이 뾰족뾰족하지 않고 부드럽게 깎여서, 손에 쥐어도 연필에 눌리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또,연필깎이에 넣고 깎아보니, 나무도 균일하게 깎여나가는 것이 깎아놓은 모습이 참 예쁘더군요. 완벽한 원추형을 이루는 것이, 전 그렇게 깔끔하게 깎인 연필은 현실에서는 처음 봤습니다(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싼 연필들만 써 온 거냐).
삐뚤어지지 않고 예쁜 방추형으로 깎인 연필심.
이런 시각적인 면만으로도 어느정도 만족감이 충족됩니다.
실제 공책에 써 본 느낌.
일기는 아니지만, 내용을 공개하기에는 다소 창피해서 공개해도 무난한 문장만 남기고 삭제했습니다.
주말 동안에 사용을 해서 끝이 약간 뭉툭하게 변함 → 글씨가 좀 두꺼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공책 정도 간격의 줄에는 별 문제 없이 쓸 수 있었습니다. 점점 쓰다보니 글씨를 날려쓰게 돼서, 글씨가 좀 흐트러졌는데, 또박또박 쓰면 좀 어 예쁘게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연필이 종이에 걸리는 그륵그륵, 좋게 말하면 사각사각한 느낌은 덜 한 것 같습니다. 전 악력 문제로 마찰이 좀 더 강한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끙. 그 점은 약간 미묘합니다. 그러고 보면, 평가가 대부분 부드럽게 잘 쓰인다는 거였지. 헉.
팔로미노 블랙윙 연필깎이
팔로미노 블랙윙 휴대용 연필깎이입니다.
연필을 쓰려면 연필을 깎아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지금은 연필깎이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칼로 깎아서 써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팔로미노 제품 페이지에서 요 녀석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구매했습니다.
팔로미노 블랙윙 연필깎이는 날이 두 개가 들어 있어서 한쪽은 나무를 깎아주고, 다른 한쪽은 심을 깎아주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연필을 깎을 때에는 1번, 나무를 깎는 쪽에 넣고 깎다가 2번, 심을 깎아주는 부분에 넣고 마저 깎아주면 됩니다.
저는 다른 것들보다 심만을 깎아주는 부분이 있다는 소개에 홀랑 넘어갔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다보면 심이 뭉툭하게 변해서, 아직 연필심 자체는 계속 쓸 수 있음에도 연필을 깎아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갈려나가는(?) 연필의 양도 적지가 않은 편이지요. 비싼 연필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너무 아까웠습니다. 저 자신도 심이 뾰족한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나무를 오롯이 다 갉아내지 않아도 심을 깎아준다는 말은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일단 생긴 것은 패키지를 포함해 준수합니다. 상자도 단단한 종이를 사용해서 형태가 잘 잡혀 있는 것이, 첫 인상이 꽤 괜찮았습니다. 연필깎이 자체도 날이 두개가 들어있기 때문에 좌우로 납작하게 클 것 같은데, 생각보다 슬림하고요. 크기가 작은 지우개 정도 크기입니다.
성능도 포레스트 한 자루를 깎아본 결과는 괜찮습니다. 날이 단단하게 고정돼 있어서 연필을 깎을 때 무척 안정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연필들이 슬슬슬슬 깎입니다. 후기에서 정줄 놓고 깎다보니 (연필이 부드러운 것도 있었겠지만), 비싼 연필이 없어질 뻔 했다고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잘 깎입니다.
다만, 심만 깎아주는 부분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더군요.
전 뭉툭한 연필을 넣고 돌리면 정말 나무는 건드리지 않고 심만 다시 뾰족하게 해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무를 좀 깎아내기는 하더이다. 다만, 연필을 오롯이 깎을 때처럼 팍팍 깎아내는 것이 아니라 슬슬슬 긁어내는 느낌으로 뭉툭해진 부분을 다듬어주는 것 같네요. 도중에 그냥 꺼내버려서 약간 애매한 상태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심이 다시 원추형으로 변한 걸 보면, 좀 더 돌려주면 나무는 덜 깔아내면서 다시 뾰족해 질 것 같긴 합니다.
준수한 외모와 성능만큼이나 가격도 준수합니다.
제가 이번에 팔로미노 연필세트(?)를 사면서 들인 돈의 절반 가까이가 이 연필깎이 가격이었습니다. 그냥 봐도 비싼 가격 + 타 브랜드의 연필깎이와 비교해도 비쌈 = 왠지 바가지로 산 건가? 라는 생각이 뭉클뭉클 올라옵니다. 그렇지만 칼날에 made in German이라고 쓰여 있고, 겉상자에도 똑같이 mad in German이라고 쓰여 있어서 말입니다. 성능도 괜찮고 외양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래, 유럽에서 온 거구나, 라고 생각하고 이 비싼 가격을 납득해보기로 했습니다.
맺음말
요 며칠 문방구에만 들인 돈을 다 따지면 꽤 됩니다. 아마도 라미 사파리 만년필 하나 살 정도는 될 듯. 그리고 그 라미 사파리 만년필은, 집에 만년필이 여러 자루 있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가격 때문에 선뜻 구매하질 않고 있었지요.
그랬던 것을, 연필 사는데 그와 거의 비슷한 가격을 지출했음.
역시나, 지름신이 무섭긴 합니다. 한 번 빗장이 풀리니 정신을 못 차리네요.
그렇지만 연필로 사각사각 쓰고 있으려니 왠지 기분이 좋습니다.
볼펜이나 만년필로 쓰고 있으면 뭔가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 별로 안 들었는데, 연필은 그냥 계속 사각사각 공책에 글씨를 쓰고 있고 싶어집니다. 아마도 연필은 글씨 쓰는데 힘을 많이 줘야 함 + 글씨체가 날아가지 않도록 이따금 신경 써 줌 = 글씨를 쓰는데 초 집중을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다음부터는 글씨를 쓸 때 최대한 차분하게 또박또박 써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시무시한 소리 하나.
원래, 인터넷으로 연필을 알아보던 중에 가장 먼저 살펴본 것은 카스텔 9000이었습니다.
그런데 카스텔 9000의 가격대를 잘못 봐서 블랙윙으로 선회한 것이었는데요. 덕분에 더 비싸게 주고 연필을 사고 말았습니다(블랙윙보다 카스텔 9000이 더 쌉니다).
게다가, 원래 쓰려고 했던 카스텔 9000은 필기감이나 그립감이 어떤지 궁금해서요.
카스텔 9000의 가격을 잘못 봤다는 것을 파악한 뒤. 궁금증에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이쪽도 12개 한 다스를 주문하고 말았습니다. 허헐.
그리고 내친 김에 하나를 더 더하면.
알고 보니까 제가 컬러링북으로 놀기 위해 샀던 색연필이 파버카스텔 꺼였습니다, 36색 수채색연필. 켁.
색연필은 주로 미술용도로 쓰이는 것 같지만, 어차피 똑같은 연필 형태이니 짙은색 계열은 평범하게 필기를 하는데에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연필은 현재의 것 + 36개 (전부는 아니더라도).
와. 연필 풍년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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